Idea Telling – 일상에 말걸기
[그래픽디자인] 2002, 06본문
idea Telling – 일상에 말걸기
박금준
601비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표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
# 1.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유홍준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동안 별 느낌 없었던 것들에 유난히 집착하게 될 때, ‘아하! 그렇구나’ 손가락 튕기며 쾌재를 부를 때, 난 이 한마디를 되뇌곤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사물이, 자연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것, 그리고 다시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
이것이 내 디자인과 일상을 만들어가는 중심이다. 나에겐 일상이 곧 디자인이고 편집이다. 아이디어의 시작이다.
# 2.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상상에는 창조의 힘이 있다.”
601비상의 모든 책에는 이 문구가 도장처럼 찍혀있다. 난 이 말을 사랑한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말, ‘상상’. 상상은 생각의 힘을 키워주고 에너지가 되어준다.
땅만 보고 걸어가도, 하늘만 쳐다보며 걸어가도 순간순간 스치며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사물, 평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려는 오랜 시간의 연습 때문이리라.
어떻게 하면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엔 딱히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이 날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성, 아카시아 꽃이 밤하늘의 전등처럼 보이는 감성을 지니고 있다면 충분히 상상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리라.
이 감성들은 열린 귀와 열린 눈으로 들어오는 또 다른 감성을 먹고 자란다. 그렇게 열린 가슴으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왜?에 대해 고민하고 근거가 마련될 때까지 다양한 문화적 충격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
준비하는 크리에이터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디어는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지 않을까?
난 상상의 힘을 믿는다. 그 상상의 힘은 내 삶에서, 시간을 포함한 삶의 공간 안에서 숨쉬고 있다.
# 3.
상상과 아이디어, 감성, 또 뾰족뾰족한 논리들을 어떻게 쿠킹하면 좋을까?
난, 물 잘 먹은 스폰지가 숨쉬는 것처럼 그렇게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흠뻑 들이마시고, 들이마신 것을 그대로 내쉬고… 단, 내쉬는 물에선 꼭 이런 맛이 나야 한다. 무언지 의미없는 아름다움,
혹은 그럴듯한 표현보다는 명료하면서 번뜩이는 크리에이티브의 맛.
스타일, 테마, 표현수단, 또 그 모든 행위의 과정 하나하나에서 나름대로의 색깔을 끄집어내는 것이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논리나 아이디어 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무게를 둔다.
하나의 제작물을 만들다보면 아이디어 스케치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나중에라도 그 아이디어에 의존하게 될까봐 그것들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솔직한 표현으론 두렵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각 과정의 아이디어들은 과감히 날리고 기획서만 남겨둔다. 그래야만 내가 더 새로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제와 같은 아이디어, 성공했던 아이디어에 머무르는 건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
# 4.
종이와 질감과 냄새, 그 위에 얹힌 다양한 잉크의 조화, 이러한 것들이 엮어내는 매력을 평생 곁에 두며 살고 싶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아이디어를 빛나게 하는 색,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타이포…
그 매력이라는 것에 하나를 더 꼽는다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종이 혹은 책의 멋’이다.
일방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상호 교통할 수 있는 디자인과 메시지가 나, 그리고 601비상의 주된 테마이다.
“어떤 어휘를 구사하느냐보다 그 어휘가 어디에서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15년 전 처음 디자이너의 이름을 달았을 때부터 변함없이 지켜온 생각이다.
다양한 문화 코드에 관심이 많은 만큼 지금까지의 작업 또한 다양한 문화의 표현이자 수용, 응용에서 출발한 것들이 많다.
문화 코드들의 겉모습보다는 의식 있는 작업, ‘사람 냄새’나는 작업을 통해 따뜻함이 있는 디자인, 생명력 있는 디자인을 고집해 왔다.
그리고 그런 디자인 정신이 살아있는 책을 만들어왔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종이와 책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 잘 하는, 그런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601비상이 지금처럼 사람냄새 물씬 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자라는 것이다.
601비상 창립메시지_1998
다들 하는 대로 해버리면 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저 하던 대로만 해도 기본은 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하기 좋은 것만 하면서도 버텨갈 수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누가 “새 것”을 할 것인가.
누가 “하지 않았던 것”을 할 것인가.
누가 디자인이 “꿈꿔 온 바로 그것”을 해낼 것인가.
이제 우리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능력 이상의 능력을 시도해 본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두가 바라는 일이라면 바로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해 온 것보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 누구도 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뭔가 다르게 한다는 것. 다르게 하면서도 잘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