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빚은 인상 좋은 간판들
[주간한국] 2009, 10본문
<간판투성이> 전
한글로 빚은 인상 좋은 간판들
철 지난 행락지에서 가게 이름 대신 메뉴가 빽빽히 적힌 대형 간판을 본 적이 있다.
그 아우성에 마음이 질리고 쓸쓸했다. 절박한 사정이 짐작은 가도, 행인과 간판의 만남이
한 인연(因緣)이라 여긴다면 그렇게는 못 만들지 싶었다. 아무리 호객(呼客)이 운명이라도,
몹시 나부대는 간판은 겸연쩍다. 지나친 노출을 대한 것처럼 눈 돌리게 한다. 튀는 것 외엔
어떤 사려도 없는 그 말뜻과 글꼴이 어여뻐 보일리 없다. 그런데 이 간판들은 어떤가.
갤러리 ‘봄날’의 간판은 ” 햇살 고운 그날 오후 바람이 꽃을 피우네요”라고 말을 건다.
결을 살린 나무 바탕에 봄바람 같은 흘림체를 돋을새김했다. 디자인업체 ‘601 비상’의 간판은
헬리콥터 날개다. 근처에 ” 해낼 것인가”, “꿈꿔온 바로 그것” 같은 창립 메시지의 문구들이
따박따박 박혔다. 강건해 보인다. 작가들의 작업실에 붙인 문패는 그 자체가 작품이다.
조각가 이근세는 철판에 얇은 선으로 ‘화성공장’을 새겼다. 낮에는 빛에 따라 보일락말락
하다가 밤에는 그 틈으로 내부의 및이 새어나온다. 세상의 모든 밤에 보내는, 은근하지만 성실한
작가의 안부인사다. 화가 이목을은 선반에 사과 그림과, ‘목을 그림 공부하는 곳’이라는 글자를
채워 넣었다. 이런 인상들이라면 자주 보아도 좋겠다. ‘책’의 ‘ㅊ’, ‘옷’의 ‘ㅇ’, ‘신’의 ‘ㅅ’을
모티프로 만든 ‘좋은 책방, 예쁜 옷집, 편한 신발가게’의 어여쁜 말뜻과 글꼴은 지갑보다 마음을
먼저 연다. ‘간판투성이’전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한글 전시 프로젝트’의 일보다.
25명의 디자이너와 작가가 한글 간판을 선보인다.
22일까지 서울 홍대 앞 상상마당 아트마켓에서 열린다. 02-330-6225
강병인, ‘봄날’
박금준, ‘601비상’
정종인, ‘좋은 책방, 예쁜 옷집, 편안한 신발 가게’
이근세, ‘화성공장’
김진, ‘호두나무’
장성환, ‘디자인스튜디오 203’
이목을, ‘목을 그림 공부하는 곳’
박병철, ‘집 잘 짓는 곳’
김지선, ‘비따’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